1. 출생과 왕위 계승
세종대왕은 1397년에 조선 제4대 군주 태종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부터 학문에 흥미를 보이며, 그의 지식과 뛰어난 지도력을 인정받아 태종은 세종을 선위에 올렸습니다. 1418년, 아버지인 태종이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당시 22세로 어리지만 뛰어난 러더십을 발휘하여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세종대왕은 군주로서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조선시대를 풍요롭게 한 많은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국방력을 강화하고 국토를 확장하며, 경제와 농업을 촉진하는 종합적인 통치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문화와 예술의 발전을 촉진하고 교육을 중시하여 국민들의 교양 수준을 높이는 등의 노력으로 조선시대를 번영시켰습니다.
과학과 기술의 분야에서도 세종대왕은 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천문 관측을 통해 새로운 천체의 발견과 달력 개정에 기여하였으며, '자갈치'라는 선박을 개발하여 조선의 해상 교역을 강화했습니다. 또한, 금속 화폐를 도입하여 경제를 안정시키는 등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선도했습니다.
세종대왕은 1450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죽음은 조선시대에 큰 상실로 여겨졌지만, 그의 풍모와 업적은 그 후의 세대에도 계속 전해지며, 한글문화의 초석을 마련한 훈민정음 창제와 같은 업적은 특히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세종대왕은 군주로서 뛰어난 지도력과 예술적 감각을 기반으로 조선시대를 한층 번영시켰습니다. 문화, 교육, 과학,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혁신적인 발전은 그의 통치의 장점을 입증하며, 특히 훈민정음의 창제는 한글문화의 터전을 마련한 큰 업적 중 하나로 꼽힙니다.
2. 훈민정음 창제
15세기 당시 한자는 고려시대의 유산으로서 국민들이 읽고 쓰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에 세종대왕은 국민들의 언어 소통을 위해 한글을 창제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효율적이고 간편한 문자체계를 통해 문해력을 향상시켜 교육의 기회를 확장하고자 했습니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제작에 일선 학자와 전문가들을 모았습니다. 최인홍, 송영길, 전선 등이 이 중 주요 참여자로, 그들은 자신의 전문 지식과 아이디어를 통해 효과적인 문자체계를 개발해냈습니다.
『훈민정음』(訓民正音, 중세 한국어: 훈민정음)은 한글의 옛 이름(첫 이름)으로 세종대왕이 창제한 문자의 명칭이자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와 사용법 등을 해설해 놓은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세종 25년(1443년)에 창제된 후 1446년(세종 28년)에 반포된 훈민정음의 뜻은 '백성(民)을 가르치는(訓) 바른(正) 소리(音)'이며, 28개의 낱자로 구성되어 있다. 소리글자에 속하며, 배우기 쉽고 읽고 쓰기에 편리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 훈민정음이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한글이며, 훈민정음은 1446년에 정식으로 반포됐고 한글이란 이름은 주시경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훈민정음은 반포된 초기에 '정음(正音)'으로도 불리었고 그밖에도 언문(諺文), 언서(諺書), 반절(反切), 암클, 아햇글 등으로 불리면서 양반들에 의해 홀대받았다. 그러나 한자에 비해서 배우기 쉽고 읽고 쓰기가 쉬웠기 때문에 널리 보급되어 오늘날에는 한국어를 표기하는 공식문자가 되었다.
1443년(세종 25년) 12월에 훈민정음 28자가 창제되었다. 세종은 성삼문, 신숙주, 최항, 정인지, 박팽년 등 집현전 학자들에게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 발간과 <동국정운>을 편찬하도록 했으며 최항과 박팽년에게 『고금운회 거요』의 번역을 명했다. 1445년(세종 27) 4월에는 훈민정음을 사용하여 악장(樂章)인 『용비어천가』 를 편찬사업을 진행하였다.
1444년 2월 최만리, 신석조, 김문, 하위지, 정창손 등 집현전 내 훈민정음 반포에 반대하는 학자들은 6가지 이유를 들며 반대상소를 올렸다. 이때 상소를 올린 집현전 학자들의 대표격이었던 부제학 최만리가 한글반포에 대해 크게 반대하다가 세종의 노여움을 사 책망받고 투옥되었다. 그는 다음날 석방되었으나 사직하고 낙향했다.
1446년 음력 9월에 훈민정음을 반포하였다.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이 함께 간행되었는데, 이 책에는 훈민정음의 창제목적과 원리, 사용법 등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세종은 하급 관리를 뽑을 때 훈민정음을 시험 과목에 추가하도록 하였고, ‘삼강행실’과 같은 국가 윤리를 훈민정음으로 풀어 백성들에게 가르치도록 하였는데 이 두 가지 사항을 조선 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명문화하였다.
사서(四書)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게했고[15] 백성들이 관가에 제출하는 서류를 훈민정음으로 작성토록 했으며 형률 적용 과정에서 그 내용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하여 알려 주도록 했다. 궁중의 여인들에게 모두 훈민정음을 익히도록 하고 세종 자신은 조정의 대신과 기관에 훈민정음으로 글을 내리기도 했다. 이후로 민간과 조정의 일부 문서에서 훈민정음을 사용했다. 이러한 훈민정음 보급 정책에 따라 훈민정음은 점차 퍼져 나갔다.
훈민정음의 판본에는 한문으로 쓰여진쓰인 예의본, 해례본 그리고 한글로 쓰인 언해본(諺解本)이 있다. 세종실록에 실려져 있는 것을 실록본(實錄本)이라고 구분 짓기도 하는데, 이는 예의본(例義本)에 속한다. 이런 구분은 편의상 그리하는 것으로 이 가운데 단행본으로 완전한 책의 형태를 지닌 것은 해례본(解例本)뿐이며 통상적으로 이를 《훈민정음해례본》이라 부른다. 박승빈이 소장했던 언해본이 단행본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정밀한 조사에 의하면 『월인석보』 책머리 부분을 따로 제책 한 것이다.《훈민정음해례본》은 약 500부 정도가 인쇄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훈민정음해례본》의 편찬사실은 기록에만 존재할뿐, 20세기 초반경만 해도 단 한 권도 그 존재사실이 알려지지 않았었는데, 1940년에 안동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이후 2008년에 상주에서 한부가 더 발견되어 현재까지는 두 부가 존재한다.
3. 시대별 한글의 발전
3-1) 글자의 간소화와 발음 중시
훈민정음은 기존의 한자와 달리 간단하고 쉽게 익힐 수 있는 형태로 디자인되었습니다. 14개의 자음과 10개의 모음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발음을 중시하여 국민들이 쉽게 배울 수 있도록 고안되었습니다.
3-2) 초기 한글의 특징 (15세기 중반)
훈민정음이 만들어지면서 초기 한글은 현재와는 약간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한글은 글자 간격이 크고 형태가 다양했지만, 이후의 변천과 발전을 거치면서 조선 후기에는 현재와 유사한 형태로 정착되었습니다.
3-3) 한글의 발전과 변천 (16세기 이후)
조선시대 후반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한글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발전했습니다. 16세기 이후에는 한글의 형태가 안정화되면서 글자의 모양과 발음이 현재의 한글과 유사해졌습니다.
3-4) 한글의 보존과 확장 (20세기 이후)
일제 강점기에는 한글이 억압당하였지만, 광복 이후에는 다시 활기를 띄며 발전해 나갔습니다. 한글은 국내에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아, 현재는 전 세계에서 사용되는 언어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3-5) 현대 한글의 특징 (21세기)
현대 한글은 14 자음과 10 모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발음과 표기가 정교하게 규정되어 있습니다. 컴퓨터와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한글 입력이 용이해지면서 글로벌한 정보화 사회에서도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